벳토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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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벳토 가오루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선수로 활동했으며, 이후 1952년부터 1979년까지 여러 팀의 감독을 역임했다. 선수 시절에는 오사카 타이거스와 마이니치 오리온스에서 뛰며 1950년에는 홈런왕, 타점왕, MVP를 석권했다. 감독으로서는 마이니치, 긴테쓰, 다이요, 히로시마 등에서 활동했으며, 198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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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토 가오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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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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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오루 벳토 |
원어 이름 | 別当 薫 |
로마자 표기 | Bettō Kaoru |
출생일 | 1920년 8월 23일 |
사망일 | 1999년 4월 16일 |
출생지 |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
사망 장소 | 알 수 없음 |
신장 | 180cm |
체중 | 75kg |
포지션 | 외야수 / 감독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 구제 갑양중학교 구제 게이오기주쿠대학 젠오사카 |
프로 | 오사카 타이거스 (1948년–1949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0년–1957년) |
첫 출장 | 1948년 4월 4일 |
마지막 출장 | 1957년 |
감독 및 코치 경력 | |
통계 | |
타율 | .302 |
안타 | 965 |
타점 | 549 |
수상 | |
퍼시픽 리그 MVP | 1950년 |
일본 시리즈 우승 | 1950년 |
일본 시리즈 MVP | 1950년 |
명예의 전당 | |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유형 | 일본 |
연도 | 1988년 |
방법 | 선수 선정 위원회 |
2. 선수 경력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출신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시절 뛰어난 타격 실력을 선보였다. 대학 졸업 후 1947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양대 리그 출범과 함께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하여 홈런왕, 타점왕, 리그 MVP를 석권하고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초대 일본 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후에도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으며, 1952년에는 시즌 중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선수 겸임 감독으로 활동하다 1957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아마추어 시절
벳토 가오루는 목재상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구제 고야 중학교(현재의 고요가쿠인 중학교·고등학교) 시절에는 팀의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활약하며, 1937년과 1938년 봄 선발 대회, 1938년 여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고시엔 무대를 밟았다.중학교 졸업 후에는 구제 니가타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입학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야구부 소속으로 도쿄 육대학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통산 35경기에 출전하여 133타수 47안타, 타율 .353, 1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1942년 봄 리그에서는 당시 역대 최고 타율인 .500을 기록하며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1943년 10월 16일에 열린 출진 학도 장려 조케이전(소위 '마지막 조케이전')에서는 게이오 대학의 4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6년 봄에 재개된 도쿄 육대학 리그에서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고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가을, 게이오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잠시 집안의 목재상 일을 도왔다. 하지만 1947년, 논프로 팀인 '전 오사카'의 일원으로 도시 대항에 출전했으나 우승을 놓치자 프로 전향을 결심하게 된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전 도쿠시마와의 3위 결정전에서는 하야시 요시카즈를 상대로 승리했다. 당시 27세의 나이였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팬이었던 가게우라 마사루가 소속된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 2. 프로 선수 시절
게이오기주쿠 대학 졸업 후 잠시 가업을 잇다가 1947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출전을 계기로 프로 전향을 결심, 당시 27세의 나이로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1948년, 입단 첫해 시범 경기부터 홈런을 터뜨리며 주목받았고, 고시엔 구장, 나루미 구장,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토너먼트 대회 8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 우승을 이끌었다.[2] 정규 시즌에서도 타격 1위를 달렸으나, 6월 27일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도루 중 왼발 골절 부상을 당해 3개월간 결장했다. 부상 복귀 후 타율 .328을 기록했지만, 규정 타석 미달(52타석 부족)로 수위 타자 타이틀은 놓쳤다.
1949년에는 비거리가 늘어나는 공인 래빗 볼이 도입되면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후지무라 후미오와 함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시즌 안타 2위[3], 타율 .322, 39홈런, 126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 129득점을 기록했다(이 기록은 다음 해 고즈루 마코토가 경신).
1949년 시즌 종료 후, 양대 리그 분열 과정에서 와카바야시 타다시, 혼도 야스지, 도이가키 타케시 등과 함께 퍼시픽 리그의 신생팀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했다. 1950년, 마이니치 이적 첫해에 타율 .335(리그 2위), 43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며 홈런왕과 타점왕 2관왕을 차지했다. 시즌 20회의 맹타상을 기록하는 등 팀의 퍼시픽 리그 초대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 또한 34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쇼치쿠 로빈스의 이와모토 요시유키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를 달성했다. 쇼치쿠 로빈스와의 1950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타율 .500, 3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MVP에도 선정되었다.

1951년부터 래빗 볼 사용이 중단되어 홈런 수는 감소했지만, 리그 4위인 타율 .309를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 같은 해 7월 26일 긴테츠 펄스전에서는 2루, 3루, 홈 스틸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는 '퍼펙트 스틸'을 달성하기도 했다. 1952년에는 헤이와다이 사건으로 유아사 사다오 총감독과 와카바야시 타다시 감독이 물러나자 시즌 중반(7월 30일)부터 감독 대행을 맡아 43경기에서 30승 13패(승률 .698)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53년에는 다시 선수로 복귀하여 타율 .305를 기록했고, 이 해까지 6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54년부터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하여 야마우치 가즈히로, 에노모토 기하치, 가쓰라기 다카오 등을 지도하고, 스도 유타카를 발굴하여 주전 2루수로 기용하는 등 지도자로서의 역량도 발휘했다.[4] 선수로서는 1957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벳토는 180cm의 큰 키와 유연한 타격 폼을 가졌으며, 특히 몸쪽 낮은 공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빠른 발까지 갖추어 당시 난카이 호크스의 이이다 도쿠지와 함께 '발 빠른 거포'로 명성을 떨쳤다.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 | 희생타 | 희생플 | 볼넷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48 | 한신 | 89 | 377 | 348 | 67 | 114 | 19 | 4 | 13 | 180 | 57 | 16 | 5 | 0 | -- | 29 | 0 | 17 | -- | .328 | .379 | .517 | .897 |
1949 | 137 | 622 | 572 | 129 | 184 | 28 | 6 | 39 | 341 | 126 | 13 | 2 | 0 | -- | 48 | 2 | 44 | -- | .322 | .376 | .596 | .972 | |
1950 | 마이니치 | 120 | 526 | 477 | 108 | 160 | 23 | 4 | 43 | 320 | 105 | 34 | 7 | 0 | -- | 49 | 0 | 36 | 15 | .335 | .397 | 0.671 | 1.068 |
1951 | 108 | 444 | 398 | 77 | 123 | 23 | 7 | 16 | 208 | 67 | 22 | 9 | 1 | -- | 44 | 1 | 38 | 15 | .309 | .379 | .523 | .902 | |
1952 | 120 | 513 | 456 | 93 | 127 | 26 | 10 | 18 | 227 | 67 | 40 | 13 | 1 | -- | 56 | 0 | 30 | 17 | .279 | .357 | .498 | .855 | |
1953 | 82 | 312 | 279 | 38 | 85 | 16 | 4 | 11 | 142 | 48 | 14 | 9 | 0 | -- | 33 | 0 | 18 | 11 | .305 | .378 | .509 | .887 | |
1954 | 108 | 370 | 339 | 51 | 84 | 15 | 2 | 11 | 136 | 45 | 34 | 6 | 3 | 0 | 27 | 1 | 40 | 6 | .248 | .305 | .401 | .706 | |
1955 | 73 | 265 | 239 | 35 | 66 | 15 | 1 | 4 | 95 | 24 | 9 | 9 | 2 | 1 | 23 | 0 | 15 | 3 | .276 | .340 | .397 | .737 | |
1956 | 50 | 93 | 80 | 9 | 22 | 5 | 0 | 0 | 27 | 10 | 4 | 5 | 1 | 3 | 9 | 0 | 15 | 1 | .275 | .348 | .338 | .686 | |
1957 | 4 | 3 | 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1 | .000 | .000 | .000 | .000 | |
통산: 10년 | 891 | 3525 | 3191 | 607 | 965 | 170 | 38 | 155 | 1676 | 549 | 186 | 65 | 8 | 4 | 318 | 4 | 254 | 69 | .302 | .366 | .525 | .892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2. 3. 은퇴 후
은퇴 후 여러 구단에서 감독직을 역임했다.소속팀 | 직책 | 재임 기간 | 비고 |
---|---|---|---|
마이니치 오리온스 | 감독 대행 | 1952년 | |
마이니치 오리온스·다이마이 오리온스 | 감독 | 1954년 ~ 1959년 | ※1954년 ~ 1957년은 선수 겸임 |
긴테쓰 버펄로스 | 감독 | 1962년 ~ 1964년 | |
다이요 웨일스 | 감독 | 1968년 ~ 1972년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감독 | 1973년 | |
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 감독 | 1977년 ~ 1979년 |
특히 긴테쓰 버펄로스 감독 시절(1962년 ~ 1964년)에는 전년도 다이테츠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중퇴하고 입단했으나 1군 출전 없이 방출 대상이었던 도이 마사히로를 발탁한 일화가 유명하다. 벳토는 도이의 장타자로서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4번 타자로 기용했으며,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용하며 실전 경험을 통해 성장시켰다. 당시 18세였던 도이가 4번 타자를 맡자 큰 화제가 되었지만, 성적이 부진할 때는 "약팀의 화제 만들기일 뿐"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훗날 도이는 벳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네모토 씨와 벳토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도이 마사히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벳토 씨는 야마우치 씨, 카츠라기 씨, 에노모토 씨 같은 선수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낸 분입니다. 만년 최하위에 머물며 안주하던 긴테쓰라는 팀을 젊은 선수 기용으로 바꾸려 하셨던 거죠. 벳토 씨는 승리하는 감독이라기보다는 키우는 감독입니다. 우승 경력은 없지만, 야마우치 씨, 에노모토 씨, 저, 마츠바라 마코토처럼 2000안타를 친 타자들을 이렇게나 많이 키워냈습니다.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과, 한번 믿은 선수는 끝까지 기용하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어느 팀에서든 그 팀의 미래를 위한 토대를 만든 감독입니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7]
벳토의 긴테쓰 감독 첫해인 1962년, 팀은 여전히 최하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잭 블룸필드가 .374의 높은 타율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쿠보 마사히로가 독특한 변화구 '쿠보 볼'을 앞세워 28승으로 최다승 타이틀을 따내는 등 개별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투수진은 쿠보(29승) 외에 쿠로다 츠토무, 글렌 미켄즈가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으나 타선의 지원 부족으로 쿠로다는 8승 23패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타선은 블룸필드와 도이의 활약 덕분에 팀 타율 .252로 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팀 홈런(70개, 리그 5위)과 도루(64개, 리그 최하위)는 부족했다. 전년도 우승팀과의 게임차가 51.5게임이었던 것에 비해, 이 해에는 우승팀 도에이에 8승 18패로 크게 뒤졌음에도 21게임차로 격차를 줄였다. 2위 난카이와는 12승 14패, 4위 다이마이와는 13승 13패로 선전했다.
1963년에는 최하위 탈출이 기대되었으나, 4월 부진으로 리그 선두 난카이와 7게임차 최하위로 시작했다. 5월 이후 블룸필드, 세키네 준조, 코다마 아키토시, 도이 마사히로 등 타선의 분전으로 3위까지 올라서며 전년도 우승팀 도에이와 시즌 막판까지 A클래스(상위권) 경쟁을 벌였다. 도에이의 부진으로 9년 만의 A클래스 복귀를 노렸으나, 시즌 막판 우승 경쟁 중이던 난카이와 니시테츠에게 남은 5경기를 모두 패하며 최종 4위로 마감했다. 아쉽게 A클래스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승수가 패수보다 1승 많은 '저금 1'로 시즌을 마치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투수진에서는 전년도 최다승 투수 쿠보가 19승(20승 달성 실패)과 평균자책점 2.36으로 평균자책점 1위 타이틀을 차지했고, 토쿠히사 토시아키가 팀 내 최다인 20승, 2년차 야마모토 시게마사가 9승 17패로 패수가 많았지만 팀 내 최다인 168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선발진이 호투했다. 이들 3명이 팀 승리의 40%를 책임졌으나, 구원진의 부진으로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5위에 그쳤다. 타선은 블룸필드가 다시 한번 수위 타자에 올랐고, 4번 타자 도이가 리그 최다 2루타를 기록하는 등 활발한 모습을 보이며 팀 타율과 2루타 수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다만 팀 홈런은 98개로 리그 5위에 머물렀다.
최하위에서 4위로 도약하며 기대를 모았던 1964년 시즌, A클래스 진입을 목표로 했으나 출발이 좋지 않아 4월을 최하위로 마감했다. 5월에는 13승 14패 1무로 선전했지만, 6월 이후 연패가 이어지며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월에 6연승을 거두며 상위권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이미 격차가 벌어진 뒤였다. 결국 우승팀 난카이에 28.5게임, 5위 니시테츠에 9게임 뒤진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전년도 약진의 원동력이었던 투수진은 사사키 히로이치로가 리그 최다인 73경기에 등판하고 쿠보, 토쿠히사 등 4명이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했지만, 동시에 토쿠히사가 리그 최다인 23패를 기록하는 등 5명이 두 자릿수 패배를 당하며 기복이 심했다. 팀 평균자책점, 피안타, 자책점 모두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다. 타선은 4번 타자 도이가 팀 내 최다인 28홈런을 치는 등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 타율 상위 10걸에 4명의 이름을 올렸으나, 수비 불안으로 리그 최다인 165개의 실책을 기록하며 발목을 잡혔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 후반인 1952년 헤이와다이 사건 직후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과 와카바야시 다다시 감독이 경질되면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감독 대행을 맡으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4년간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5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에도 1959년까지 마이니치 감독직을 이어갔다.
현역 은퇴 이후 여러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긴테쓰 버펄로스(1962년 ~ 1964년), 다이요 웨일스(1968년 ~ 1972년, 1977년 ~ 197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1973년) 등 여러 팀의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선수 육성에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 야마우치 가즈히로, 에노모토 기하치, 도이 마사히로, 다시로 도미오 등 많은 강타자를 길러냈다[7]. 특히 감독으로서 통산 1000승 이상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승 경험이 없는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1980년부터는 다이요 웨일스 구단의 상무 이사와 구단 대표를 역임하며 구단 경영에도 참여했다. 1988년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가네다 마사이치, 니시모토 유키오 등과 함께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9년 4월 16일, 급성 심부전으로 투병 끝에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1. 감독 시절의 수완
1968년 다이요 웨일스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에는 선수 구성에 큰 변화는 없었으나, 4번 타자 쿠와타 타케시가 벳토와의 갈등으로 선발에서 제외되고 외야수 마츠바라가 3루수로 기용되는 변화가 있었다. 투수진은 모리나카 치카라, 시마다 겐타로, 히라마츠 마사지, 야마시타 리츠오 등이 로테이션을 지켰으나, 타선의 도움으로 승리하는 경기가 많아 팀 평균자책점은 3.71로 리그 5위에 머물렀다. 타격진에서는 마츠바라, 에지리나, 콘도 카즈히코, 이토 이사오 등이 활약하며 팀 홈런 리그 3위(131개)를 기록했다. 팀은 개막 초반 부진했으나 최종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4연패를 달성한 요미우리에게는 12승 14패로 선전했지만, 4위 산케이에게 8승 18패로 크게 뒤져 A클래스 진입에는 실패했다. 이 해부터 팀 모자 마크가 'T'에서 웨일스를 상징하는 'W'로 변경되어, 다이요 마지막 해인 1992년까지 사용되었다.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3년 연속 A클래스인 3위를 유지했다.
- 1969년: 5월 한때 요미우리와 공동 선두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이후 요미우리의 독주와 주니치, 아톰즈와의 3위 경쟁 끝에 최종 3위를 기록했다. 이는 미하라 오사무 감독 시절인 1964년 이후 5년 만의 A클래스 진입이었다. 우승팀 요미우리(11승 13패 2무)와 2위 한신(14승 12패)에게는 선전했지만, 5위 아톰즈에게 9승 16패 1무로 약세를 보여 5할 승률 달성에는 실패했다. 투수진에서는 히라마츠와 야마시타가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고, 타카하시 시게유키, 모리나카 등이 로테이션을 지키며 팀 평균자책점 리그 3위(3.19)를 기록했다. 타선에서는 4번 마츠바라와 콘도, 에지리 등이 활약했다. 훗날 12구단 상대 승리를 달성하는 노무라 오사무가 이 해 입단했다.
- 1970년: 나카츠카 마사유키를 외야수로, 시게마츠 쇼조를 1번, 마츠바라를 3번, 에지리를 4번 타자로 기용하는 등 공격적인 라인업을 구성했다. 시즌 초반 최하위로 부진했으나 6월 이후 2위까지 오르며 요미우리를 추격했다. 하지만 막판 한신에 밀려 최종 3위로 마감했다. 6연패를 달성한 요미우리에게는 14승 11패 1무로 우세를 보였으나, 한신(11승 15패)과 4위 히로시마(11승 14패 1무)에게는 열세를 보였다. 투수진에서는 히라마츠, 야마시타, 타카하시, 사카이 카츠지가 로테이션을 지켰다. 특히 히라마츠는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앞세워 25승으로 다승왕과 사와무라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키토 히로시는 6월 9일 야쿠르트전(가와사키)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 노무라와 마시바 시게유키가 구원 투수로 1군에 자리 잡는 등 투수진에 긍정적인 소식이 많았다. 반면 타선은 팀 홈런 106개로 리그 5위에 그쳤다.
- 1971년: 11년 만의 우승을 노렸으나, 요미우리의 개막 독주 속에 시즌 초반 부진했고, 6월에는 최하위까지 떨어졌다. 이후 순위를 끌어올려 주니치, 히로시마와 2위 경쟁을 벌였으나 최종 3위에 머물렀다. 투수진은 에이스 히라마츠가 17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했고, 사카이, 야마시타, 타카하시 등도 제 몫을 하며 팀 평균자책점 리그 1위(2.31)를 기록하는 뛰어난 성과를 냈다. 그러나 타격진은 나카츠카, 에지리, 마츠바라 외에는 부진하여 팀 타율(.215)과 팀 홈런(82개) 모두 리그 최하위에 그쳤다.
다이요 감독 마지막 해인 1972년에는 미국에서 클리트 보이어, 존 시핀을 영입하고 롯데에서 에토 신이치를 트레이드로 데려와 타선을 강화했지만, 전년부터 이어진 투수진의 약화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센트럴 리그에서는 한신(무라야마 미노루 선수 겸 감독 → 카네다 마사야스 대행), 히로시마(네모토 리쿠오 감독 → 모리나가 카츠야 대행) 등 감독 교체가 잇따랐고, 다이요에서도 8월 연패가 이어지자 8월 31일, 벳토는 "우승이 절망적이다"라며 휴양에 들어갔고 그대로 퇴임했다.
1973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응원단 동창이었던 당시 구단주 마쓰다 고헤이가 미래의 구단 대표 자리를 염두에 두고 직접 초빙한 것이었다. 벳토는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팀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유일한 감독이었다(이시모토 슈이치는 히로시마현 출신이며, 네모토와 조 루츠는 감독 부임 전 카프 코치 경력이 있었고, 그 외 감독들은 외국인, 외부 영입, 자체 육성 선수 출신 OB였다). 시즌 초반 팀이 호조를 보이며 6월에는 5년 만에 선두로 나서기도 했고, 전반기를 3위로 마쳤다. 그러나 후반기에 타선이 극심한 빈타에 시달리면서 순위가 하락하여 결국 60승 67패 3무, 2년 연속 최하위(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당시 구단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니시노 조 간부와의 갈등(이 간부의 독단적 운영은 당시 구단 내 문제로 여겨졌으며, 전임 감독 네모토 리쿠오의 휴양 및 사임 원인으로도 지목된다)도 퇴임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1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마쓰다 구단주가 구상했던 구단 대표 취임도 이루어지지 못했다[8]. 이 사태를 계기로 마쓰다 구단주는 니시노의 후임으로 일본 축구 협회에서 마쓰다로 복귀해 총무과장을 맡고 있던 시게마쓰 요시노리를 구단 대표로 임명했다[9].
연도 | 팀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나이 | |
---|---|---|---|---|---|---|---|---|---|---|---|---|
1954년 | 매일 다이마이 | 3위 | 140 | 79 | 57 | 4 | .581 | 89 | .236 | 2.69 | 34세 | |
1955년 | 3위 | 142 | 85 | 55 | 2 | .607 | 89 | .251 | 2.46 | 35세 | ||
1956년 | 4위 | 154 | 84 | 66 | 4 | .558 | 95 | .234 | 2.40 | 36세 | ||
1957년 | 3위 | 132 | 75 | 52 | 5 | .587 | 80 | .239 | 2.47 | 37세 | ||
1958년 | 4위 | 130 | 62 | 63 | 5 | .496 | 72 | .239 | 2.79 | 38세 | ||
1959년 | 2위 | 136 | 82 | 48 | 6 | .631 | 114 | .255 | 2.76 | 39세 | ||
1962년 | 긴테쓰 | 6위 | 131 | 57 | 73 | 1 | .438 | 70 | .252 | 3.40 | 42세 | |
1963년 | 4위 | 150 | 74 | 73 | 3 | .503 | 98 | .256 | 3.44 | 43세 | ||
1964년 | 6위 | 150 | 55 | 91 | 4 | .377 | 112 | .254 | 3.63 | 44세 | ||
1968년 | 다이요 | 4위 | 133 | 59 | 71 | 3 | .454 | 131 | .236 | 3.71 | 48세 | |
1969년 | 3위 | 130 | 61 | 61 | 8 | .500 | 125 | .239 | 3.19 | 49세 | ||
1970년 | 3위 | 130 | 69 | 57 | 4 | .548 | 106 | .241 | 2.75 | 50세 | ||
1971년 | 3위 | 130 | 61 | 59 | 10 | .508 | 82 | .216 | 2.31 | 51세 | ||
1972년 | 5위 | 130 | 57 | 69 | 4 | .452 | 135 | .242 | 3.66 | 52세 | ||
1973년 | 히로시마 | 6위 | 130 | 60 | 67 | 3 | .472 | 104 | .223 | 3.04 | 53세 | |
1977년 | 다이요 | 6위 | 130 | 51 | 68 | 11 | .429 | 176 | .268 | 4.94 | 57세 | |
1978년 | 4위 | 130 | 64 | 57 | 9 | .529 | 132 | .273 | 3.90 | 58세 | ||
1979년 | 2위 | 130 | 59 | 54 | 17 | .522 | 135 | .266 | 4.05 | 59세 | ||
통산:19년 | 2377 | 1162 | 1111 | 104 | .489 | A 클래스 9회, B 클래스 8회 |
- ※1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140경기제
- ※2 1958년부터 1962년, 1968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3 1967년, 미하라 오사무 감독 휴양 중(6월 3일~7월 10일) 및 미하라 감독 복귀 후 사임(10월 4일~시즌 종료) 시 감독 대행 (42경기 18승 21패 3무 승률 .462)
- ※4 1972년, 8월 31일부터 휴양 (당시 104경기 52승 50패 2무 승률 .510). 감독 대행은 아오타 노보루.
- ※5 통산 성적은 실제로 지휘한 경기를 기준으로 함.
- 매일(매일 오리온즈)은 1958년에 다이마이(매일 다이에이 오리온즈)로 구단명을 변경함.
3. 2. 감독 역임 팀
벳토 가오루는 여러 프로 야구팀에서 감독을 역임했다.=== 마이니치/다이마이 오리온즈 ===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마이니치 오리온즈(1958년부터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감독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팀은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으며, 1959년에는 리그 2위를 기록했다.
=== 긴테쓰 버팔로즈 ===
1962년부터 1964년까지 긴테쓰 버팔로즈의 감독을 맡았으나, 팀 성적은 하위권에 머물렀다.
=== 다이요 웨일스 (1기) ===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을 맡았다.
- '''1968년''': 선수 구성은 전년과 비슷했지만, 4번 타자 쿠와타 타케시가 벳토와의 갈등으로 선발에서 제외되고 외야수 마츠바라가 3루수로 기용되었다. 투수진은 모리나카 치카라, 시마다 겐타로, 히라마츠 마사지, 야마시타 리츠오 등이 로테이션을 돌며 성적을 냈으나, 타선의 지원에 의존하는 경기가 많아 팀 평균자책점은 3.71로 리그 5위에 그쳤다. 타격에서는 마츠바라, 에지리나, 콘도 카즈히코, 주전 포수 이토 이사오 등이 활약하며 팀 홈런 131개(리그 3위)를 기록했다. 시즌 초반 부진했으나 최종 5위로 마감했다. 요미우리에게는 12승 14패로 선전했지만, 4위 산케이에게 8승 18패로 크게 밀려 A클래스 진입에는 실패했다. 이 해부터 모자 마크가 "T"에서 웨일스의 "W"로 변경되어, 다이요 마지막 해인 1992년까지 이어졌다.
- '''1969년''': 5월 한때 요미우리와 공동 선두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후 격차가 벌어져 주니치, 아톰즈와 3위 경쟁을 벌였다. 9월 종료 시점에는 2위 한신에 0.5게임 차까지 따라붙었으나 최종 3위를 기록하며, 미하라 오사무 감독 시절인 1964년 이후 5년 만에 A클래스에 복귀했다. 우승팀 요미우리에 11승 13패 2무, 2위 한신에 14승 12패로 선전했지만, 5위 아톰즈에게 9승 16패 1무로 약세를 보여 5할 승률 달성에는 실패했다. 투수진에서는 3년차 히라마츠 마사지와 야마시타 리츠오가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고, 타카하시 시게유키, 모리나카 치카라 등이 로테이션을 지켜 팀 평균자책점 3.19(리그 3위)를 기록했다. 타격진에서는 4번 타자 마츠바라가 분전했고, 콘도 카즈, 에지리 등도 나름의 성적을 남겨 팀 홈런 125개(리그 4위)를 기록했다. 이 해 전 구단 승리를 달성하는 노무라 오사무가 입단했지만, 시즌 막판 1경기 등판에 그쳤다.
- '''1970년''': 나카츠카 마사유키를 외야수로 전환하고, 1번 시게마츠 쇼조, 3번 마츠바라, 4번 에지리 등으로 타선을 개편했다. 개막 초반 부진하여 4월에는 최하위에 머물렀으나, 5월 이후 순위를 끌어올려 6월에는 2위까지 올라 요미우리를 추격했다. 9월 종료 시점에는 3위였지만 요미우리에 4.5게임 차로 따라붙었으나, 막판 한신에 밀려 최종 3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은 6연패를 달성한 요미우리에 14승 11패 1무로 오히려 우세를 보였지만, 한신에 11승 15패, 4위 히로시마에 11승 14패 1무로 열세를 보였다. 투수진은 히라마츠 마사지, 야마시타, 타카하시 시게유키, 사카이 카츠지가 로테이션을 지켰다. 특히 히라마츠는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앞세워 25승으로 다승왕과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키토 히로시는 6월 9일 야쿠르트전(가와사키)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 2년차 노무라 오사무와 신인 마시바 시게유키가 구원 투수로 1군에 정착했다. 타격진은 팀 홈런이 106개로 리그 5위에 그쳤다.
- '''1971년''': 11년 만의 우승을 기대했으나, 요미우리가 개막부터 독주하면서 팀은 흐름을 타지 못했다. 6월에는 최하위까지 떨어졌다가 여름 이후 A클래스 경쟁을 벌여 최종 3위를 지켰다. 투수진은 에이스 히라마츠 마사지가 17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했고, 사카이 카츠지, 야마시타 리츠오, 타카하시 시게유키 등도 활약하며 팀 평균자책점 리그 1위(2.31)를 기록했다. 반면 타격진은 나카츠카 마사유키, 에지리, 마츠바라 등이 분전했지만, 다른 타자들의 부진으로 팀 타율 .215, 팀 홈런 82개로 모두 리그 최하위에 그쳤다.
- '''1972년''': 미국에서 클리트 보이어와 존 시핀을 영입하고, 롯데에서 에토 신이치를 트레이드로 데려와 타선을 강화했지만, 전년부터 이어진 투수진의 약점으로 부진했다. 센트럴 리그에서는 여러 팀의 감독이 교체되는 혼란 속에서 다이요 역시 8월 연패가 이어지자, 벳토는 8월 31일 "우승이 절망적"이라며 휴양에 들어가 사실상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 대행은 아오타 노보루가 맡았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73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을 맡았으나, 팀은 6위에 머물렀다.
=== 다이요 웨일스 (2기) ===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다시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을 맡았다.
- '''1977년''': 이 해 주전으로 자리 잡은 다카기 유타카를 비롯해 나카쓰카 마사키, 마쓰바라 마코토, 시핀 등이 활약했지만, 투수진은 히라마쓰 마사야, 마시바 히데키, 사이토 아키오 등이 로테이션을 지켰다. 팀은 7월까지 5할 승률을 유지했으나 8월 이후 연패하며 부진했다. 9월에는 5위로 올라서며 최하위 탈출을 노렸으나 10월 부진으로 결국 2년 연속 최하위(6위)로 마감했다. 다만 승률은 전년보다 소폭 상승했다. 타격진에서는 급성장한 다시로 후미히로와 베테랑 마쓰바라 마코토 등의 활약으로 팀 홈런 176개(리그 2위)를 기록하며 강력한 타선을 유지했다. 투수진에서는 신인 사이토 아키오가 패전이 많았음에도 신인왕을 수상했고, 스기야마 도모타카 등도 나름의 성적을 냈지만, 팀 평균자책점은 4.94로 악화되었다. 8월 2일, 구단은 다음 해부터 홈구장을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이전한다고 공식 발표했고, 가와사키 구장을 홈으로 사용한 마지막 해가 되었다. 상대 전적에서는 우승팀 요미우리에게 10승 16패로 약했고, 2위 야쿠르트에게는 12승 12패 2무로 호각세를 보였다.
- '''1978년''': 홈구장 이전에 따라 구단명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로 변경하고, 유니폼 디자인과 팀 컬러(마린 블루)도 새롭게 바꿨다. 개막 초반 요미우리, 야쿠르트와 선두 경쟁을 벌였고, 8월에는 요미우리를 3.5게임 차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후반기 투타의 체력 저하와 히로시마의 추격으로 최종 4위로 마감했다. 투수진에서는 베테랑 히라마쓰 마사야와 2년 차 사이토 아키오 외에, 닛폰햄에서 트레이드로 복귀한 노무라 가쓰야가 17승을 거두며 팀의 4위 도약에 크게 기여했다. 팀 평균자책점은 3.90으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타격진에서는 요미우리로 이적한 시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메이저 리그 출신 펠릭스 미얀을 영입하여 공수에서 활약했다. 홈구장 이전 영향으로 팀 홈런은 132개로 감소했지만, 부동의 4번 타자 마쓰바라 마코토와 다시로 후미히로, 다카기 유타카 등의 활약으로 팀 타율은 리그 3위를 기록했다. 상대 전적에서는 최하위 한신에게 19승 5패 2무로 크게 앞섰지만, 다른 팀들과는 대등하거나 열세였다.
- '''1979년''': 우승을 목표로 세이부에서 모토오 미쓰오, 주니치에서 진 마틴을 영입했다. 전년도 우승팀 야쿠르트의 개막 부진 속에 한때 선두에 오르기도 했다. 전반기를 3위로 마쳤으나, 후반기 히로시마의 독주 속에 5위까지 떨어졌다가 막판 분전으로 최종 2위를 기록했다. 이는 1964년 이후 15년 만의 최고 성적이었지만, 후반기에는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다. 투수진은 노무라 가쓰야, 히라마쓰 마사야, 사이토 아키오에 더해 2년 차 엔도 가즈히코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활약했고, 히라마쓰는 2.39의 평균자책점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러나 난카이에서 이적한 사토 미치로가 부진하면서 팀 평균자책점은 4.05(리그 4위)로 다소 하락했다. 타격진에서는 진 마틴이 28홈런을 기록하며 2위 도약에 기여했고, 펠릭스 미얀이 수위 타자를 차지하는 등 팀 타율은 .268(리그 3위)을 기록했지만, 팀 홈런은 135개로 리그 최하위였다. A클래스 경쟁 상대였던 한신에게 17승 7패 2무로 크게 앞섰지만, 우승팀 히로시마에게 8승 16패 2무로 크게 밀린 것이 아쉬웠다.
=== 감독 성적 ===
연도 | 팀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나이 | |
---|---|---|---|---|---|---|---|---|---|---|---|---|
1954년 | 마이니치 다이마이 | 3위 | 140 | 79 | 57 | 4 | .581 | 89 | .236 | 2.69 | 34세 | |
1955년 | 3위 | 142 | 85 | 55 | 2 | .607 | 89 | .251 | 2.46 | 35세 | ||
1956년 | 4위 | 154 | 84 | 66 | 4 | .558 | 95 | .234 | 2.40 | 36세 | ||
1957년 | 3위 | 132 | 75 | 52 | 5 | .587 | 80 | .239 | 2.47 | 37세 | ||
1958년 | 4위 | 130 | 62 | 63 | 5 | .496 | 72 | .239 | 2.79 | 38세 | ||
1959년 | 2위 | 136 | 82 | 48 | 6 | .631 | 114 | .255 | 2.76 | 39세 | ||
1962년 | 긴테쓰 | 6위 | 131 | 57 | 73 | 1 | .438 | 70 | .252 | 3.40 | 42세 | |
1963년 | 4위 | 150 | 74 | 73 | 3 | .503 | 98 | .256 | 3.44 | 43세 | ||
1964년 | 6위 | 150 | 55 | 91 | 4 | .377 | 112 | .254 | 3.63 | 44세 | ||
1968년 | 다이요 | 4위 | 133 | 59 | 71 | 3 | .454 | 131 | .236 | 3.71 | 48세 | |
1969년 | 3위 | 130 | 61 | 61 | 8 | .500 | 125 | .239 | 3.19 | 49세 | ||
1970년 | 3위 | 130 | 69 | 57 | 4 | .548 | 106 | .241 | 2.75 | 50세 | ||
1971년 | 3위 | 130 | 61 | 59 | 10 | .508 | 82 | .216 | 2.31 | 51세 | ||
1972년 | 5위 | 130 | 57 | 69 | 4 | .452 | 135 | .242 | 3.66 | 52세 | ||
1973년 | 히로시마 | 6위 | 130 | 60 | 67 | 3 | .472 | 104 | .223 | 3.04 | 53세 | |
1977년 | 다이요 | 6위 | 130 | 51 | 68 | 11 | .429 | 176 | .268 | 4.94 | 57세 | |
1978년 | 4위 | 130 | 64 | 57 | 9 | .529 | 132 | .273 | 3.90 | 58세 | ||
1979년 | 2위 | 130 | 59 | 54 | 17 | .522 | 135 | .266 | 4.05 | 59세 | ||
통산:19년 | 2377 | 1162 | 1111 | 104 | .489 | A 클래스 9회, B 클래스 8회 |
- ※1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140경기제
- ※2 1958년부터 1962년, 1968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3 1967년, 미하라 오사무 감독 휴양 중(6월 3일~7월 10일) 및 미하라 감독 복귀 후 사임(10월 4일~시즌 종료) 시 감독 대행 (42경기 18승 21패 3무 승률 .462) - 이 기록은 통산 성적에 포함되지 않음.
- ※4 1972년, 8월 31일부터 휴양 (시즌 104경기 52승 50패 2무 승률 .510 시점). 감독 대행은 아오타 노보루. 표의 성적은 시즌 최종 성적.
- ※5 통산 성적은 실제로 지휘한 경기 기준.
- 마이니치 오리온즈는 1958년에 다이마이 오리온즈(다이에이 유니온스와 합병)로 구단명을 변경.
4. 기타
180cm의 좋은 체격을 바탕으로 부드럽고 무리 없는 타격 폼을 가졌으며, 특히 몸쪽 낮은 공 처리에 뛰어난 강점을 보였다. 발도 빨라 당시 난카이의 이이다 토쿠지와 함께 빠른 발을 가진 거포로 명성을 날렸다.
4. 1. 문화적 영향
벳토 가오루의 만화 이미지가 그려진 티셔츠는 배우 제프 브리지스가 영화 ''피셔 킹'',[1][13][14] ''콜드 피트'', ''빅 레보스키''[15][16] 등 여러 작품 속 캐릭터를 연기하며 착용한 바 있다.감독 시절인 1970년대에 출연한 HOYA 안경·바리럭스 II의 CM이 현재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프로 야구 선수답지 않은 지적인 인상 덕분에 '구계의 신사'라고 불렸다. 하지만 현역 시절에는 강타는 물론, 공·수·주 삼박자를 갖춘 선수로서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2008년 출진학도 장행 조·경전을 영화화한 ''라스트 게임 마지막 조·경전''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벳토'라는 인물이 등장했으며, 가토 류지가 연기했다. 같은 해 D-BOYS가 극작화한 ''라스트 게임 ~마지막 조·경전~ (극작품)''에서도 그를 모델로 한 '벳푸 유타카'가 등장하여, 나카무라 유이치와 세토 코지의 더블 캐스트로 연기되었다. 2010년 재연판에서는 아라이 아츠시가 이 역할을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미스 고베'와 결혼했는데, 당시 새 신부가 잡지 인터뷰에서 식사에 관해 "영양 면에도 신경 쓰지만, 식기에도 신경 쓰고 있다. 아름다운 그릇으로 먹으면 식욕 증진으로 이어진다"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식량난 시대였던 당시로서는 '그릇으로 먹게 한다'는 발언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고 한다.[10] 또한 작가 사토 아이코에게 벳토는 여학생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이후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11]
4. 2. 개인사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출신이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시절 도쿄 지역 6개 대학 야구팀으로 구성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춘계 리그에 출전하여 당시 사상 최고 타율인 5할을 기록하며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1947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졸업 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2년간 활동했다. 1950년에 기존의 단일 리그에서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라는 양대 리그가 출범하자 퍼시픽 리그 팀인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이적했다. 1950년 시즌에는 타율 3할 3푼 5리, 43개의 홈런, 105타점을 기록하여 홈런왕과 타점왕을 석권했고, 동시에 리그 MVP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양대 리그 출범과 함께 도입된 일본 시리즈에서 센트럴 리그 우승 팀인 쇼치쿠 로빈스와의 맞대결에서 팀이 우승하는 데 기여했으며, 일본 시리즈 초대 MVP에 선정되었다.
1952년 헤이와다이 사건 직후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과 와카바야시 다다시 감독이 경질되면서 감독 대행으로 활동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4년간 선수 겸 감독으로 지냈으며, 1957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감독으로 활동했으나 1959년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현역 은퇴 이후 여러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긴테쓰 버펄로스 감독(1962년 ~ 1964년), 다이요 웨일스 감독(1968년 ~ 1972년, 1기),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1973년), 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감독(1977년 ~ 1979년, 2기)을 지냈다.
감독 시절 마이니치(다이마이) 시절 외에는 주로 중하위권 팀을 지휘하여 팀 우승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마이니치에서는 야마우치 가즈히로, 에노모토 기하치, 긴테쓰에서는 도이 마사히로, 다이요에서는 다시로 도미오 등 수많은 타자들을 육성했다. 감독으로서 통산 1000승 이상을 달성하면서도 우승 경험이 없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이요 감독 1기 시절(1968년~1972년)은 다음과 같다.
- '''1968년''': 선수 구성은 전년과 비슷했으나, 4번 타자 쿠와타 타케시와의 갈등으로 그를 선발에서 제외하고 외야수 마츠바라를 3루수로 전환했다. 투수진은 모리나카 치카라, 시마다 겐타로, 히라마츠 마사지, 야마시타 리츠오 등이 로테이션을 지켰으나 팀 평균자책점은 3.71(리그 5위)에 머물렀다. 타선은 마츠바라, 에지리나, 콘도 카즈히코, 이토 이사오 등이 활약하여 팀 홈런 131개(리그 3위)를 기록했으나, 최종 순위는 5위였다. 이 해부터 모자 마크를 'T'에서 'W'로 변경하여 1992년까지 사용했다.
- '''1969년''': 5년 만에 A클래스(3위)에 진입했다. 투수진에서는 히라마츠와 야마시타가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고, 타선에서는 마츠바라 등이 활약했다. 이 해 노무라 오사무가 입단했다.
- '''1970년''': 나카츠카 마사유키를 외야수로 전환하는 등 공격적인 오더를 구성했다. 시즌 중반 2위까지 올랐으나 최종 3위로 마감했다. 투수진에서는 히라마츠가 25승으로 다승왕과 사와무라상을 수상했고, 키토 히로시가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 '''1971년''': 투수진이 팀 평균자책점 2.31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히라마츠는 17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에 올랐다. 그러나 타선 부진(팀 타율 .215, 팀 홈런 82개, 모두 리그 최하위)으로 3위에 머물렀다.
- '''1972년''': 미국에서 클리트 보이어, 존 시핀을 영입하고 롯데에서 에토 신이치를 트레이드로 영입해 타선을 강화했지만, 투수진 약점으로 부진했다. 결국 8월 31일, "우승이 절망적"이라며 휴양에 들어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 시절인 1970년대에 출연한 HOYA 안경 광고 때문에 "구계의 신사"로 불렸지만, 현역 시절에는 강타와 공·수·주 삼박자를 갖춘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미스 고베"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당시 식량난 시대에 아내가 잡지 인터뷰에서 "아름다운 그릇으로 먹으면 식욕 증진으로 이어진다"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10]。 작가 사토 아이코는 여학생 시절 벳토를 동경했으며, 이후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밝혔다[11]。
학도 출진 당시 통신병으로 복무하며 히요시 다이 지하호에서 이오지마 옥쇄의 타전을 수신했다[12]。
벳토 가오루의 만화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배우 제프 브리지스가 영화 《피셔 킹》[13][14], 《빅 리보스키》[15][16] 등에서 착용하기도 했다.
2008년 출진학도 장행 조·경전을 영화화한 《라스트 게임 마지막 조·경전》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벳토'''라는 인물이 등장(가토 류지 분)했고, 같은 해 D-BOYS가 극작화한 《라스트 게임 ~마지막 조·경전~ (극작품)》에서는 '''벳푸 유타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나카무라 유이치와 세토 코지 더블 캐스트, 2010년 재연판 아라이 아츠시 분).
1980년부터 다이요 구단의 상무 이사와 구단 대표를 역임했다. 1988년 나가시마 시게오, 가네다 마사이치, 니시모토 유키오 등과 함께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9년 4월 16일에 급성 심부전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소속으로 타율 .335, 43홈런, 105타점, 160안타, 34도루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특히 이와모토 요시유키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를 달성하는 등 뛰어난 성적으로 정규 시즌 MVP와 일본 시리즈 초대 MVP를 석권했다.
데뷔 첫해인 1948년부터 1953년까지 6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51년 7월 26일 긴테쓰전에서는 한 이닝에 2루, 3루, 홈 스틸을 모두 성공시키는 진기록(퍼펙트 스틸)을 세웠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또한 1950년부터 1952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최다 장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퍼시픽 리그 최장 타이기록이다. 올스타 게임에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5회 출전했다.
5. 1. 타이틀
5. 2. 수상
- MVP : 1회 (1950년)
- 베스트 나인 : 6회 (1948년 ~ 1953년)
- 일본 시리즈 MVP : 1회 (1950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88년)
참조
[1]
웹사이트
Jeff Bridges in ''The Fisher King''
http://preshrunk.org[...]
[2]
서적
日本プロ野球 歴代名選手名鑑
[3]
웹사이트
阪神・中野 初回先頭打で先制点お膳立て 近本と最多安打争うリーグ2位111本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2022-07-24
[4]
간행물
横浜大洋ホエールズ マリンブルーの記憶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21-01
[5]
웹사이트
Walter O'Malley : Dodger History : International Relations
https://www.walterom[...]
[6]
웹사이트
日中国交正常化による日中間の野球交流がその後の中国の野球活動へ及ぼした影響―1945年から1960年までと1972年から1989年までの両期間の野球活動の比較―
https://aichiu.repo.[...]
[7]
서적
日本プロ野球監督列伝―1936-2014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
[8]
서적
広島東洋カープ70年史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
[9]
웹사이트
今日も野球日和 第36回 「チームを変えた人事 きっかけとなった出来事」
https://www.jimo2.jp[...]
ジモ通、プレスネット
2016-10-01
[10]
서적
さらば、東京巨人軍
2001-02
[11]
서적
マドリッドの春の雨
角川書店
1989-01-01
[12]
웹사이트
日吉台地下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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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應義塾機関誌 三田評論
2011-04-01
[13]
웹사이트
Jeff Bridges in ''The Fisher King''
http://preshrunk.org[...]
2005-07
[14]
웹사이트
デュードも大好きな偉大なベースボールプレイヤーTシャツ!
https://vincentvega.[...]
vincentvega
2016-06-16
[15]
웹사이트
Kaoru Betto Baseball Raglan T-shirt worn by The Dude (Jeff Bridges) in The Big Lebowski
https://www.spotern.[...]
2022-05-02
[16]
웹사이트
The Big Lebowski Kaoru Betto ベースボールラグランTシャツ
https://www.amazon.c[...]
amazon
2022-05-02
[17]
문서
일본 기록이자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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